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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편지] 계엄령의 역사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의 난데없는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하는 와중에 국회와 시민이 뭉쳐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신속하고 단호한 대처로 민주주의를 수호한 데 대해 전 세계가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취약성을 노출한 경종이다. ‘사우스 코리아의 혼란(turmoil)’이라는 부제 아래 계속해서 보도되는 뉴욕타임스 기사들을 보며 나는 북미 사람들이 하나같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접했다. “미국에서도 계엄령이 갑자기 선포될 수 있나?”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를 앞두고 불안정한 정치 분위기를 우려하며 나온 질문이다.   캐나다는 계엄령 자체가 아예 없는 나라다. 1914년에 통과된 캐나다 전쟁조치법(War Measures Act)은 전시에 연방정부에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역사상 세 번 사용됐다. 그러나 1988년에 이 전쟁조치법은 긴급법 (Emergency Act)으로 대체되었다. 군사가 개입된 계엄령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법이다. 미국의 경우도 대통령에게 군사통치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은 헌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각 주 정부는 긴급상황시 사법심사를 통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   계엄령(martial law)의 영문 용어는 고대 로마 전쟁의 신 마스(Mars)에서 유래되었다. 그 법의 유래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비상시 공화정의 체제를 보전하기 위해 정무관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가 그 뿌리다. 역사에서 총 13번 발동되었는데, 공화정 말기에 폼페이우스·카이사르 등의 정치가들에 의해 악용돼 결국 로마 공화정은 몰락했다. 역사의 결론은 단순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계엄령을 발동시킨 세력은 반드시 몰락한다는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계엄령 역사 비상계엄령 선포 계엄령 해제 계엄령 자체

2024-12-09

[아메리카 편지] 유니크한 문화유산 한국의 음식문화

두 살 된 딸을 목말 태우고 식구들 보러 한국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부모님과 다양한 식사 일정을 함께하면서, 우리나라의 식생활 문화가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느꼈다.   한국인들은 음식을 정말 사랑한다. “밥 먹었니” “밥 한번 먹자” 등의 인사말부터 ‘먹방’의 개념이 탄생하기까지, 식생활 중심의 문화가 이만큼 발달한 나라도 찾기 힘들다. 우리 조상들이 제천행사 때 전국에서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듯, 농경사회의 대가족 사회 구조는 식생활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고조선 커뮤니티의 핵은 음식이었다. 음식이 인간관계를 엮어주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한국계 미국 작가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가 우리 마음에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음식이란 매개체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양의 음식문화는 식탐을 칠죄 중의 하나로 꼽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었다. 물론 그 사상적인 토대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학파가 대표적이다. 고기는 신들에게 제물로 바칠 때만 먹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식생활은 음식보다는 음주의 문화로 볼 수 있다. 그 유명한 심포지온은 저녁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밤새 행하는 술 파티일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금욕주의 사상에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한 플라톤은 대화편 ‘향연’에서 심포지온을 미와 에로스의 개념을 논하는 지적인 활동으로 승화시킨다.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어 교역이 활발해지고 부유한 왕실 문화가 발달하면서 스파르타식 도덕이 전반적으로 퇴보했고, 로마제국의 음식문화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음식문화는 여타 문명과 비교가 되지 않는 유니크한 문화유산이다. 한국 음식의 핵인 된장·고추장·간장 등 장이 특히 그렇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문화유산 음식문화 문화유산 한국 한국 음식 한국계 작가

2024-08-25

[아메리카 편지] 중용의 덕성

전 세계의 대학들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반대하는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4월 30일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뉴욕시립대에서 캠퍼스를 점거한 약 300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촉발된 운동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토론토 대학에서도 4주째 캠퍼스 한복판에 150여개의 텐트를 치고 점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요청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투자를 회수하고 이스라엘 대학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다. 다양한 펀드의 도움으로 돌아가고 있는 공립대학 입장에서는 들어주기 힘든 요구다. 더욱 문제 되는 것은 복잡한 역사를 지닌 반유대인 감정이 얽혀 유대인 학생들의 안전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다. 대학 측은 강제해산을 위한 법원 명령을 요청했고, 현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대학가의 친팔레스타인 시위는 2011년 뉴욕 월가 점령 시위(아큐파이 월스트리트)의 유산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제와 전 세계적 규모가 비슷하다. 어느 지역을 점거하고 숙박을 하면서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까지 떠나지 않는 형태의 시위다. 그 원천은 보통 1930년대 미국 노동자 조합의 ‘연좌 농성’으로 보지만, 이러한 종류의 시위는 벌써 고대 그리스의 문학에 등장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뤼시스트라테’에 등장하는 유명한 사례는 해학적이지만 리얼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남편들을 상대로 ‘섹스 파업’을 하는 그리스의 여성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는 이야기다. 이 여성들은 그리스의 평화를 이룩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해피엔딩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궁극적 원인은 종교적 이념의 독선적 성격에 있다. 그리고 히틀러의 반유대인 악행 등 기나긴 서구 역사의 업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강자는 이스라엘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강자가 먼 안목을 지니고 중용의 덕성을 실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중용 덕성 이스라엘 대학들 친팔레스타인 시위 점거 시위

2024-07-04

[아메리카 편지] 나발니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푸틴 정권의 반정부 리더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16일 갑작스럽게 옥사했다. 지난 20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했던 나발니는 시장 및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마다 체포되거나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2020년 8월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독살될 뻔했다. 당시 베를린의 병원으로 이송됐던 나발니는 체포 및 암살 등의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제 발로 귀국했다. 자신은 서유럽에서 편히 살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 정권에 대항해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돼 “청년을 부패시키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법도 법이다”는 신조로 사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기원전 5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의 과두제인 30인 정권하에 있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대립 세력을 숙청했다. 1년 만에 민주정권이 복귀되면서 30인 정권에 관여한 이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시됐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지혜롭다고 명성을 얻은 모든 사람과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배층의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현인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적 물음이다. 나발니나, 소크라테스나 자기가 소속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정치도 이러한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대통령 선거 아테네 지배층

2024-03-07

[아메리카 편지] 나발니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푸틴 정권의 반정부 리더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16일 갑작스럽게 옥사했다. 지난 20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했던 나발니는 시장 및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마다 체포되거나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2020년 8월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독살될 뻔했다. 당시 베를린의 병원으로 이송됐던 나발니는 체포 및 암살 등의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제 발로 귀국했다. 자신은 서유럽에서 편히 살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 정권에 대항해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돼 “청년을 부패시키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법도 법이다”는 신조로 사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기원전 5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의 과두제인 30인 정권하에 있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대립 세력을 숙청했다. 1년 만에 민주정권이 복귀되면서 30인 정권에 관여한 이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시됐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지혜롭다고 명성을 얻은 모든 사람과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배층의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현인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적 물음이다. 나발니나, 소크라테스나 자기가 소속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정치도 이러한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소크라테스 러시아 대통령 대통령 선거 아테네 지배층

2024-03-05

[아메리카 편지] 총기와 민주주의

얼마전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조지아주 고등학교에서도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또다시 미국에서는 총기소지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일반인 총기 보유 비율로 미국을 따라가는 나라가 없다. 일반인 100명당 120개 이상의 총기가 나돌고 있다. 사람 수보다 총기가 많은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캐나다는 일반인 100명당 35개, 프랑스는 20개의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그와 비례해 일반인 총기 사망률도 선진국 중에서 미국을 따라가는 나라가 없다. 캐나다보다 8배가 높고, 영국의 340배가 된다. 2021년 통계에 의하면 총기로 사망한 사람 수가 35개 주에서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수를 능가할 정도다.   총기법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미국은 총기 규제를 못 하고 있는 것일까. 공화당이 총기 소유권을 지지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전미총기협회(NRA)가 규제 반대 로비를 계속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 특유의 역사적·사상적 배경에 있다. 총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미국의 근간이 된 헌법에 명시돼있다. 특히 1791년에 쓰인 수정헌법 제2조는 자유 국가의 안보를 위해 “국민이 무기를 보유하고 소지할 권리는 침해되어선 안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물론 개척시대 사고방식(frontier mentality)의 산물로 21세기 미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영화가 말해주듯 미국의 민주주의는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고 하는 개인주의, 다시 말해 공동체 도덕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총기를 불법화하면 오직 불법자들만이 총기를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생각할 때 유교를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의 도덕질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민주주의 총기 총기소지 논란 일반인 총기 총기 소유권

2024-02-28

[아메리카 편지] 자부심과 자격지심

지난 주말 수잔 윤이라고 하는 내 토론토 친구의 수필이 뉴욕타임스(NYT)에 실렸다. 최근 어린이책 작가로 데뷔한 수잔은 지난여름 25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고, 그 경험을 담은 수필이 NYT 칼럼으로 발탁됐다. 친구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서양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지난 20여 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새삼 느꼈다. “니하오”나 “곤니치와”로 관심을 끌려 했던 길거리 상인들이 요즘엔 완벽한 발음의 “안녕하세요”로 말을 건다. 서양의 10대들이 K팝 광팬이 돼 한국어 학원에 다닌다는 말도 흔히 듣는다. 토론토 대학의 한국어 수업도 대기자 명단이 길어 들어가기 힘들다는 불평이 다반사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 그대로다.   그런 반면, 한국에 사는 미국인 수필가 콜린 마셜이 2020년 뉴요커 월간지의 코로나 관련 기사에서 언급했던 한국인들의 자격지심도 엄연히 실존한다. 마셜은 “효율적인 코로나 대처 방안으로 유명한 한국에서 아직도 상당수 국민이 한국이 후진국이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그 이유 중 하나로 일제 강점의 후유증을 꼽았다. 식민지 근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관계에서 배울 것이 많다. 로마제국이 그리스 영토를 모두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우월함’은 로마인들도 인정했다. 로마인들은 학문적인 글은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로 쓰는 것을 선호했고, 그리스 미술 작품들은 수많은 복사본을 만들어 수집했다. 심지어 그리스인을 노예로 들여 철학 선생님으로 삼는 일이 보통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열등의식은 커녕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정확한 실상을 세계사적 안목 속에서 파악하고 창조적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자격지심 자부심 한국어 학원 한국어 수업 그리스 문화

2024-01-24

[아메리카 편지] 마이나데스

여전사 아마조네스에 이어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특이한 부류의 여인들은 ‘마이나데스’다. 이들은 광기로 가득 찬 디오니소스 신봉자들이다. 반인반염소인 사티로스와 함께 디오니소스 주위에서 술과 춤과 음악을 즐기며 신을 모신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동물가죽을 둘러 입고 큰 회향 줄기를 지팡이로 삼고 있다. 산 동물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 고기를 생으로 뜯어 먹는 관습도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코스 여신도들’은 마이나데스 내러티브의 근원을 보여준다. 디오니소스는 12명의 올림포스 신 중 유일하게 인간인 어머니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신으로서의 정당성과 힘을 증명해야 했다.     이 드라마는 고향인 테베로 돌아온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신성을 부정한 사촌동생 펜테우스 일가를 몰락시키는 이야기다. 왕실 여인들을 비롯한 테베 여성들 사이에 광란적인 디오니소스 숭배가 퍼져가는 가운데, 디오니소스에게 잠시 홀린 펜테우스가 여장을 하고 몰래 축제를 구경하러 나간다. 뒷산을 하늘거리며 걷는 디오니소스 여신도들의 모습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황홀경을 연출한다. 나무 위에 숨은 펜테우스는 결국 발각돼 광기에 홀린 어머니와 이모들 손에 사지가 뜯기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마이나데스 역시 아마조네스처럼 온순하고 절제된 모습과 상반된 여성상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기화에 새겨진 마이나데스의 모습은 관습과 어긋나는 행동이 초래하는 비극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불충분하다. 실제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그리스 여인들은 마이나데스와 같은 모습과 행동을 하며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발산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극도로 제한된 사회에서 끔찍하도록 매혹적인 모습의 이러한 여성형이 공상만은 아니라는 것은, 실존했던 고대 그리스의 기생 ‘헤타라이’들이 증명한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디오니소스 여신도들 디오니소스 축제 디오니소스 주위

2023-11-10

[아메리카 편지] 성 정체성 소동

최근 캐나다 전역에서 ‘어린이를 위한 백만행진’ 시위가 일어났다. 캐나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공립 초·중·고에서 채택한 성교육 커리큘럼과 성 정체성 및 성 소수자를 주제로 하는 교육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이에 맞서 성 소수자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이들은 ‘백만행진’이 보수 세력이 어린이를 위한다는 빌미로 조직한,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시위라고 주장했다.   지난 몇 년간 북미 공립학교들이 채택한 성전환 지향적인 정책에 많은 부모가 걱정하고 있다. 성전환을 원하는 학생이 새로운 이름을 쓰고 심지어는 미성년 성호르몬 치료를 받는 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에게는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성 정체성과 그 유동성의 사례는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디오니소스다. 올림포스 신 중 유일하게 인간 어머니를 둔 디오니소스는 헤라 여신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여자아이로 가장해 님프 요정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죽음과 삶, 여성과 남성, 인간과 신 등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디오니소스는 남신으로서 유일하게 여신자들의 광적인 컬트의 대상이 된다. 예술품에서 보이는 디오니소스도 기원전 4세기께부터는 중성적인 모습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사례는 헤라클레스다. 그가 범한 살인의 죗값으로 3년을 현 튀르키예 서부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 밑에서 노예로 지내야 했다. 그동안 옴팔레와 옷 바꿔 입기를 즐겼다고 한다. 가장 남성다운 영웅에게 크로스 드레싱의 에피소드를 부여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단순한 해학을 떠나 헤라클레스의 인간미와 불완전함을 부각한다. 음양의 유동성에 관해 관대해야겠지만 정체성 자체를 바꾸는 중대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쉽게 허용하는 경향은 그 상징체계의 복합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정체성 소동 정체성 소동 정체성 자체 소수자 권리

2023-10-20

[아메리카 편지] 영웅 만들기

얼마 전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캐나다 방문 기념으로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와 함께 의회에 참석했다. 그때 98세 우크라이나 출신의 퇴역 군인이 소개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는 영웅이라는 이유로 기립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과거에 나치 친위대 ‘갈리시아’의 제1 우크라이나 사단 소속 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캐나다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 트뤼도 총리는 공식 사과했고, 하원 의장 안토니 로타는 사임했다. 러시아는 캐나다를 맹비난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갈리시아 사단에 자원한 이들은 고국을 소련의 끔찍한 지배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활동한 전쟁 영웅이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복잡한 지정학적인 세력에 얽매인 피해자라는 사실은 한국인으로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원전 6세기 말 아테네의 아고라에 세워진 조각상 ‘폭군 살해자들(Tyrannicides)’이 떠올랐다.   이는 그리스 역사상 처음으로 신화 속 인물이 아닌 실재 인물을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젊은 청년 하르모디우스와 그의 연상 연인인 아리스토게이톤이 검을 내리치는 순간을 포착한 모습이다. 이들은 아테네의 폭군을 암살한 주인공으로, 민주주의를 일으킨 영웅으로 추대받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기원전 5세기의 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이들 두 명의 영웅담을 개인적인 명분의 암살이라고 지적한다. 하르모디우스가 폭군의 아우 히파르코스에게 성희롱당한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사건이며, 폭군 히피아스가 아닌 그 아우를 암살했다고 상기시킨다. 새로운 민주정치 체제를 도입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영웅이 필요했고, 이 두 인물이 퍼펙트한 모델로서 부상했던 것이다. 인류사에서 영웅이 만들어지고 취소되는 수많은 사례의 원천이라 볼 수 있겠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영웅 우크라이나 사단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출신

2023-10-13

[아메리카 편지] 영웅과 죽음

코로나와 출산 휴가를 거치고 3년 만에 강의실에 돌아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들’이라는 제목으로 120여 명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마주 보며 강의하고 있으면, 내가 왜 굳이 교수 노릇을 해야만 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팬데믹 기간 동안 집에서 온라인수업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다. 그래서인지 대면 수업을 기대하는 열렬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서양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그리스 신화 영웅들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기 주제로 꼽히기 때문에 강의는 수월하게 진행된다. 도덕성이나 희생정신 같은 것이 안중에도 없는 그리스 영웅 특유의 성격이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이 갖춰야 할 성격과 상반되는 경우가 많아 좀 코믹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학기 첫 수업 들어가면서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많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영웅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죽음’이라는 사실이 예전처럼 가볍게 설명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 때 싸움을 거부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한 말이 영웅과 죽음의 관계를 정확히 포착한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너는 부와 건강을 누리고 오랜 삶을 살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면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대신 네 이름의 영광(kleos)은 영원할 것이다.”   고대인들에게는, 죽음을 통과해야만 영웅 추대를 받고 컬트가 생긴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사춘기 시절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지난해 러·우크라이나 전쟁을 목격하며 큰 이 학생들은 벌써 죽음으로 둘러싸인 삶을 겪었다(특히 토론토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이 많은 도시다). 죽음을 택한 아킬레우스를 영웅으로 추대하는 인류사의 경향을 가르치면서, 희생을 요구하고 죽음을 낭만화하는 가치전략이 고대사회에서 그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영웅 죽음 영웅과 죽음 그리스 영웅 영웅 추대

2023-09-29

[아메리카 편지] 문화재 ‘테러’

2015년 중동 무장 테러단체가 고대 유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문화재와 예술품을 존중하는 서양인의 감수성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이들이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주 전략적이었다. 금전적 이익을 얻지 못할 예술품이나 기념물만 골라서 파손했다. 그리고 오히려 대규모 문화재 불법거래를 주관해 테러기금을 모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주민에게 도굴 작업을 시켜 수집한 유물을 인터넷 혹은 암시장을 통해 체계적으로 판매한 것이다. 시리아 지역의 위성사진을 통해 구덩이투성이로 변한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말문이 막힌다.(사진)   지금도 이베이에서 시리아에서 출토된 로마시대 동전을 검색하면 ‘사막의 녹청이 깃든’ 갓 발굴된 물품이 허다하다. 마우스 몇 번 찍으면 누구나 간단하게, 그리고 저렴하게 살 수 있다. 그 돈은 테러단체에 직접 기부하는 셈이 된다.   고고학 유물 불법거래는 테러단체들의 모금 여부를 떠나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불법 발굴작업이 고고학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영원히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 발굴작업을 하면서 중요한 발견을 했거나 유물이 많은 층에 다다랐을 때는 꼭 작업 현장에 텐트를 치고 보초를 서야 했다. 안 그러면 다음 날 새벽에 여기저기 구멍이 파진 장면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고학은 단지 박물관에 보관할 귀중품을 발굴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층층이 기록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조사하면서 역사적인 퍼즐을 푸는 작업이다. 역사적 유물을 수집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고고학은 비상식적인 환경 속에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생존이 급급한 로컬 주민에게 문화재 보호를 강요하는 것도 아이러니지만, ‘발굴은 파괴’라는 사계(史界)의 논리도 항상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문화재 테러 대규모 문화재 문화재 보호 불법 발굴작업

2023-09-20

[아메리카 편지] 문화재와 범죄

학생 시절 뉴욕 메트로폴리탄 전 박물관장인 디에트릭트 폰 보트머 밑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때였다.   관장이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 양복을 점잖게 빼입은 두 명의 남자가 느닷없이 들어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요즘 보스에게 이상한 행동이나 분위기가 있었는가” “해외에서 예상치 못한 전화가 왔는가” “근래 ‘체르베테리’라는 지명에 관심을 가진 바가 있는가” 등등. 나는 얼떨결에 고문당하는 느낌이었다. “어… 글쎄요…”라며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보스 모르게 그런 단서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졌다.   이 이상한 일을 나는 기억에서 흘려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 후인 2006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30여 년 동안 갖고 있던 그 유명한 ‘유프로니오스 크라테르’라는 그리스 도기를 출토 국가인 이탈리아로 반환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1972년에 100만 달러라는, 그 당시로는 선례가 없는 거금으로 구입한 이 도기는 최근에 FBI가 동원된 수사 끝에 체르베테리라는 고고학 유적지에서 불법으로 발굴돼 스위스 암시장을 통해 유출됐다고 밝혀졌다. 나는 번갯불처럼 FBI 요원임이 분명한 그 두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닥터 폰 보트머가 당시 그리스·로마담당관이었을 때 그 도기를 구입했고, 그들은 보트머에 대한 혐의를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 불법적인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 협약 이후에 출토된 유물은 출토 국가 외부에서 구입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럼에도 매년 총 100억 달러로 추정되는 엄청난 양의 문화재가 불법으로 거래되고 있다. IS 테러 단체가 판매 수익을 위해 행하는 유물 밀거래만을 탓할 게 아니다. 개인 수집가는 물론 일류 박물관에서 구입하는 예술품도 1970년 이전의 거래 내력으로 조작되어 기록이 첨부되어 오기 때문이다. 김승중·고고학자 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문화재 범죄 양의 문화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리스 도기

2023-09-15

[아메리카 편지] 엘긴 마블스

최근 영국박물관(브리티시 뮤지엄)에서 소장품 2000여 점이 오랜 기간에 걸쳐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다. 더욱 놀라운 건 주요 용의자가 박물관에서 30년간 일한 수석 큐레이터라는 점이다. 용의자는 지난 20년에 걸쳐 기록이 부실한 소장품을 빼돌려 인터넷 등 여러 통로로 꾸준히 팔았다고 한다. 세계 최정상급 박물관 명성답지 않게 유물관리 및 보안시스템이 부실한 사실도 쇼킹하지만, 그동안 도난 의심 경고 등을 무시하고 비슷한 사건을 묻어두는 형식의 경영 방식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사건으로 박물관의 신뢰도가 떨어졌다. 그 결과 지난 40여 년간 그리스와 영국의 갈등을 일으킨 이른바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엘긴 마블스는 현재 영국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 장식 조각물을 일컫는다. 19세기 초에 오토만 제국의 영국 대사로 있던 토마스 브루스(엘긴 경)가 뜯어간 조각물의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해 온 그리스 정부가 이번 영국박물관 도난 스캔들을 계기로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영국 측은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고학적 유물이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고 인류 공동의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문화국제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과거, 즉 제국주의적 문화재 침탈 행위를 옹호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엘긴 마블스를 돌려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대한 선례가 되는 일이기에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엘긴 마블스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고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이 모두 문을 닫아야 할 사태가 생길 수도 있다.   1970년 문화재 불법 거래 방지에 관한 유네스코 협약 이후로 불법적으로 획득된 소장들이 하나둘씩 본래 출토 국가로 반환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이는 극도로 상징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현재 계속되는 불법 유물 거래의 총액은 전 세계적으로 무기 거래 못지않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마블스 마블스 하나 제국주의적 문화재 문화재 불법

2023-09-08

[아메리카 편지]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토론토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라이어슨 대학이 지난해 토론토 메트로폴리탄 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캐나다의 공립학교 시스템 창립자인 에거튼 라이어슨이 수많은 원주민 어린이들을 학대하고 사악한 방치로 죽음에 이르게 했던 ‘기숙학교’의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어 토론토 시내 동서를 잇는 23㎞ 길이의 주요 도로 던다스 스트리트도 이름 변경이 결정됐다. 18세기 스코틀랜드 정치인 헨리 던다스가 노예폐지를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다.   역사적인 인물들을 오늘날의 반인종차별 관점으로 재검토하는 일은 ‘취소 문화(Cancel Culture)’의 한 형태다. 개명뿐 아니라 기념물이나 동상 허물기 등의 다양한 양상을 띠는 이 현상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일도 이와 상통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선례는 고대 로마 시대의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즉 기록말살 형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죄인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우는 이 망각의 형벌은 명예를 중요시하는 로마인들에게는 특히 극심한 벌이었고, 칼리귤라·네로·도미티아누스·코모두스 등 특별히 악독한 황제들에게 사후 적용되었다. 황제의 얼굴 조각을 다음 황제의 모습으로 재조각하는 관습은 자원을 재활용하는 로마인들의 실용성도 나타내지만, 전 황제를 지웠다는 의도적인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콜로세움도 담나티오 메모리아이의 산물이다. 원래 자리 잡았던 네로 황제의 200㏊ 크기 쾌락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경기장을 지은 것이다. 네로의 금빛 거상(Colossus)은 태양신(Sol)으로 변경되어 철거를 모면했다. 한국은 요즘 이와는 반대의 맥락에서 ‘다시 세우기’가 유행인 모양이다. 끊임없는 역사의 전변(轉變)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메모리아이 네로 황제 토론토 중심지 토론토 시내

2023-09-01

[아메리카 편지] 블루와 그린 색깔의 역사

북미 생활을 하면서 가끔 영어로 실수하는 것이 있다. 신호등 불이 파랄 때 “It‘s blue (파란색이야)!”라고 외치면 친구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한국에서 초록불 대신 파란불이라고 불러온 습관 탓이다. 우리는 형용사 ’푸르다‘를 청색과 녹색, 그리고 그사이에 위치한 색상을 모두 포함한 색으로 여기지만 서양 언어권에서는 그 두 색깔은 전혀 다른 색이다.   서양사에서 ’블루‘라는 색깔의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기본 색상 중 가장 최근에 생성된 색이다. 초록색과 달리 ’블루‘는 자연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하늘과 바다를 파랗다고 하지만 365일 중 정말로 파란 하늘은 몇 번 볼 수 없고, 바다도 엄밀히 말하면 파란색으로 보이는 때가 많지 않다.   고대 그리스인은 바다를 호메로스 ’오디세이‘의 유명한 구절에 따라 ’어두운 와인색 (the wine-dark sea)‘이라 규정했다. 오현명이 부른 ’명태‘에서 말하는 검푸른 바다가 보랏빛을 띤다고 생각하면 그 개념이 멀지 않다.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대접 모양의 와인잔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타고 있는 돛배가 잔 안쪽에 둥실둥실 떠 있는 모양이다. 와인이 가득 담긴 이 잔을 입에 대고 죽 들이켜 마셔보자. 그러면 포도 줄기가 솟아나는 돛배 주위로 돌고래가 검푸른 와인색 바닷물에서 헤엄치는 신비한 이미지를 보게 된다. 디오니소스를 몰라본 해적이 모두 돌고래로 변해 물속으로 뛰어들어간 신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술 역사상 ’블루‘라는 색상은 고대 이집트를 제외하면 중세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했다. 그 이후에도 물감 재료가 무게당 금보다 비싸서 왕족이나 성모 마리아가 입는 옷의 색깔로 지정되어 신성함과 권력을 상징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색인 ’블루‘는 이토록 희귀한 역사를 자랑한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블루 색깔 미술 역사상 와인색 바닷물 기본 색상

2023-08-25

[아메리카 편지] 진보라는 패러독스

기록을 깨는 무더위와 예상치 못한 폭우가 이어진 올여름이다. 한반도뿐 아니라 슬로베니아 등 중부 유럽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인류의 가장 큰 숙제인 기후 변화 대처 방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폭염과 산불 등 지구의 종말 같은 재앙이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후손인 우리는 미래를 향한 전진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삶이 계속 진보(progress)한다는 생각은 19세기 들어서야 형성된 개념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각종 재해가 줄을 잇는 오늘날, 인류가 과연 끊임없이 발전해서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호메로스와 더불어 그리스 서사시의 양대 전통을 이루는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인류의 시대를 다섯 단계로 구분한다. 티탄들(거인족)이 지배하던 태평스러운 황금의 시대에서 시작해 올림포스 신들이 지배했던 은의 시대를 거치고, 무섭고 사나운 종족이 전쟁을 일삼고 죽음의 테마가 특징적인 청동의 시대에 다다른다. 네 번째 영웅의 시대는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 되는,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같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이 거닐던 시대다. 그리고 마지막 철의 시대는 전쟁·질병과 번뇌가 가득한 현재로, 헤시오도스 자신이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며 작품을 끝맺는다.   영웅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인간세계가 점차 타락해 가는 이미지를 그린 헤시오도스의 역사관은 그 이후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류 역사가 퇴화하는 관념을 지지했고, 주기적으로 재앙과 질병 또는 홍수로 인구가 숙청되었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발달하는 고도의 기술과 과학만을 바라보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그 결과로 타격받고 있는 인류의 웰빙과 참된 행복은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닐까.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패러독스 진보 인류 역사가 오늘날 인류 재앙과 질병

2023-08-18

[아메리카 편지] 모든 길은 로마로

한국은 길을 참 잘 만드는 나라다. 어느샌가 금방 엄청난 길들이 뻥뻥 뚫려 있다. 길이 너무 많이 생겨 고국의 산하가 다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다.     그런데 도시개발의 역사는 고대 로마제국이라는 패러다임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로마 역사상 최초의 고속도로인 ‘비아 아피아(Via Appia)’는 기원전 312년에 건설을 맡은 원로 정치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의 성을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로마에서부터 동남쪽으로 212㎞ 떨어진 도시 카푸아까지를 연결하는 이 도로는 기존 길들과 규모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설 기술도 새롭게 도입됐다.    카에쿠스가 이에 엄청난 공공의 비용을 할당한 것에 대해 동시대 원로원들은 물론 그 이후 역사학자들까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로마 정부의 경비를 이 도로에 몽땅 쏟아부어 결국 카에쿠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데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논란 이후, 도로를 포함한 공공시설 건설·건축 비용을 개인의 자비로 대고 그 대가로 명성을 얻는 관습이 보편적으로 안착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격언은 비유적 의미로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데 많은 방법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곳곳에 사방팔방으로 뻗은 대로들이 비아 아피아를 시점(始點)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로마제국의 113개 속주를 잇는 372개의 대로가 자그마치 40만㎞나 됐다. 로마제국이 그토록 번성한 이유가 바로 신속한 군대 이동과 물자 교류를 촉진하는 그 광범위한 도로 네트워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가 서양 문명사에 기여한 가장 큰 분야는 무엇보다도 건축기술이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상류층의 기증문화였다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사재를 털어 공공의 자산으로 만드는 기증 행위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로마 로마 역사상 로마 정부 공공시설 건설

2023-08-11

[아메리카 편지] 재난사태와 국가

한국이 수재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는 소식을 듣고, 재난 상황을 대비하고 복구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기관인 ‘FEMA(연방재난관리청)’가 국가 차원의 재난 대응 역할을 한다. 1979년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설립된 FEMA는 현재 전국에 10개 지부를 두고 2만 명 넘는 직원이 일하고 있다. 재난 후 복구 작업은 물론 피해를 막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에 집중한다. 10여 년 전 유학 시절 당시 뉴욕 맨해튼에서 허리케인 ‘샌디’를 겪고 4개월 동안 난민 신세로 있을 때 FEMA에서 보내준 몇천 달러 보조금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정부 차원의 재난 보조는 1803년에 뉴햄프셔 주 포트스무트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응한 입법 조치였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그 기원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그 악명 높은 네로 황제(서기 37∼68년)가 바로 재난 대응 보조를 시작한 주인공이다.     기원후 64년에 로마 도시의 3분의 2를 휩쓸어 버린 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가 직접 나서서 수습 활동을 감독하는 한편, 그 이후 자신의 궁궐을 열어 피해자들을 먹이고 재웠다. 도시 복구 작업에 자금을 대고 최초로 여러 가지 방화에 대한 법률도 제정했다.   그래서일까. 15년 후인 79년에 폼페이 전체를 삼켜버린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을 때, 황제가 된 지 몇 달 안 된 티투스는 네로의 뒤를 이어 이에 대해 체계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폼페이 피난민들의 보조는 물론이고 베수비오 화산 주변 수많은 마을과 도시를 로마 정부의 자금으로 복구했다. 그리고 복구 작업을 운영하는 특별 기관도 설립했으며 몸소 피해지역을 탐사했다. 현대 정부의 재난 대응 활동에 모범이 되는 규정이 고대 로마제국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롭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재난사태 국가 재난 대응 국가 차원 재난 보조

2023-07-31

[아메리카 편지] 오리? 아니면 토끼?

어느덧 14개월 된 딸이 요즘 온갖 동물 그림에 빠져 하나하나 손가락질하며 물어본다. 돼지 그림을 보면 “꿀꿀”, 코끼리가 보이면 “뿌우웅”, 말을 보고는 “이히힝” 소리를 낸다. 물론 아직 아이가 실제 동물을 본 건 아니다. 그런데도 그 어린 나이에 다양한 양식으로 그려진 동물을 정확히 분별하는 게 신기할 뿐이다.   시대별 회화 양식을 천착한 20세기 중반 미술 이론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그 당시 심리학 연구를 동원해 우리가 재현된 이미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했다. 비트겐슈타인으로 유명해진 ‘오리-토끼 그림’(사진)은 어떻게 보면 토끼로 보이고 어떻게 보면 오리로 보이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동시에 두 동물을 보기 힘들다. 곰브리치는 이를 이용해 우리가 그림을 인지하는 능력은 상상력이 동원되는 두 단계의 절차라고 생각했다. 일단 그림 자체의 물질적인 요소를 감지하고, 그러고 나서 그림이 나타내는 실체를 파악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동시대 철학자 리처드 볼하임은 곰브리치와는 달리 그림을 인지하는 과정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담은 복합적인 하나의 절차로 파악했다. 눈에 보이는 그림의 물리적인 요소(색·모양 등)를 감지하는 동시에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실체를 이해한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 두 이론가는 모두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실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돼지라는 동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우리 딸은 여러 가지 그림이 나타내는 무언가의 공통분모를 파악하고 그 개념을 추상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그런 딸을 보고 있으면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세상의 수많은 돼지는 가장 돼지다운 추상적인 돼지 개념(이데아)의 불완전한 복사본일 뿐이다. 그 개념을 감지하는 어린아이의 지혜는 참으로 경탄스럽다. 김승중 /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아메리카 편지 토끼 돼지 그림 동물 그림 돼지 개념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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